산행 /지리산

지리산 초등기..

지리수니 2008. 8. 26. 11:47

74년 8월 14~15일

 

지리산 자락 단성에서 태어나

달뜨기 능선 마루금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숨어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자랐지만

 

당시에는

덜컹거리는 신작로를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는

시간 지연은 물론이고 아예 빼먹고

운행을 거르기도 예사 인지라

당일로 천왕봉을 오르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9시쯤 단성에서 버스를 타고 중산리로 향하지만

뜨거운 8월 한가운데서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먼지투성이의

비탈진 도로는 쉽게 길을 내어 주지 않는다.

가다 서면 양동이로 가까운 웅덩이에서

물을 들어다가 부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잘 안 된다)

버스가 덜덜거리며 서면 "으이~~ 총각! 저~저가서 물 좀 떠오이라"

나이 드신 기사 아저씨는 젊다는 이유로 오빠를 불러댔다

그르기를 두어 번..

어쨌든 그르면 버스는 다시 간다.

 

 

중산리에서 내려 법계사를 오르며 계곡에서

군용 항구에 불을 피워 점심을 해 먹는다

시골에 사는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장비라야

군용 항구와 수통이 전부였다.

복장도 청바지에 운동화 교련복 군복 등이었다.

가지고 간 된장에 풋고추지만 맛나고 즐거운 점심시간이었다.

 

 

 

오름 하며 칼바위를 타고 올라 기념사진도 찍고

그 시절엔 바위마다 다녀간

기념으로 흔적을 남기는 게 유행이었던지

뭇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그의 원상복구가 되었지만

아직도 법계사 삼층석탑 아래엔

그때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칼바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법계사에 도착해 토방을 하나 빌려 1박을 한다.

당시엔 법계사에서 토담을 쌓아 만든 방이 몇 개 있어 민박을 했다.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만

다음날 아침밥까지 준비해두고..

 

그렇게 생전 처음 오빠 군 입대 기념으로 지리산에 들어

고즈넉한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이른 새벽에 천왕봉을 향해 오른다.

 

 

  

새벽 운무를 헤집고 싸~한 공기를 마시며

상쾌한 기분으로 천왕봉을 오르며

만난 중년부부를 난 오늘도 잊지 못한다.

 

 

 

같이 산행하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훗날 나의 모습도

저렇게 산행을 즐기며 옆자리를 같이할

동행이 있었으면.. 미래의 작은 바람이 있었다.

 

 

 

당시에는 산행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은 터라 만나는 이 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넘치고 산정에 오르면 야호~~!!

소리가 골짜기로 메아리쳤었다.

요즘은 소음이라 삼가고 있는 일을..

 

 

천왕봉에 올라 발아래로 펼쳐지는 운해를 바라보며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했었다.

정상석은 기억으로 조그만 사각 대리석 포지석이 있었고

커다란 태극기가 돌무더기에 꽂혀 있었는데

한쪽 자락이 돌무더기에 부딪혀서 찢긴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여름의 한가운데 있는 천왕봉의 공기는

긴팔을 입을 만큼 싸늘하고 구절초가 피어있었다

기념사진을 몇 차례 찍고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커니

들려오는 비보!!

육영수 여사님의 서거 소식이 전해진다.

그래서 더욱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중봉 쓰레봉을 거처 운무를  헤집고 하산하면서

길섶의 나뭇가지에 맺힌 이슬에 옷깃이 젖는다.

 

치발목 대피소에 도착했지만

그냥 버려진 듯 비워져 있다.

 

 

 

누군가가 옥상에 걸쳐놓은 나무기둥을 타고

옥상에 올랐는데 장난기가 발동한

오빠가 그걸 치우는 바람에 한바탕 실랑이를 하며 놀다가.

 

 

무제치기 폭포를 거쳐서 내려오며

계곡에서 점심도 해 먹고 막차 시간 맞춰가며 R탕도 하고

 

 

대원사도 두루 둘러보고

 

 

 

  

평촌 주차장에 도착하여

아무리 기다려도 막차는 오지 않고

 

할 수 없이 덕산까지 터덜터덜 걸어서 내려왔지만 난감하다.

가진 돈도 넉넉지 못한 터라..

 

우선 배낭에 남은 식량과 반찬으로 시장통에서 저녁을 지어먹고 

어찌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같이 간친구의 고교 동기를 만나

마침 부모님은 외가에 가시고 안 계셔서

사리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 지고

다음날 덕천강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천왕봉을 다녀온 이후로

지리산은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워하며 살았나 보다.